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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조제프 르페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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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수아 조제프 르페브르는 알자스 출신의 프랑스 군인으로, 프랑스 혁명기부터 나폴레옹 전쟁 시기까지 활약했다. 1773년 프랑스 근위대에 입대하여 혁명 발발 후 공화파로서 군대 내에서 승진을 거듭했으며,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플뢰뤼스 전투 등에 참여했다. 1799년 500인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정치에 입문했고, 브뤼메르 18일 쿠데타에 기여하여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중에는 제국 원수, 단치히 공작에 임명되었으며, 소르노자 전투, 바그람 전투 등 주요 전투에서 활약했다. 부르봉 왕정복고 이후 귀족 지위를 회복했으나, 백일천하 동안 나폴레옹에게 충성을 바쳤다. 1820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2. 초기 생애

르페브르는 1789년 바스티유 감옥 습격 당시 파리에 있었다. 그는 친구 미셸 오르데네르처럼 프랑스 혁명을 받아들였다. 혁명 초기 부대가 해산된 후, 파리 국민 방위대에 입대하여 소위 계급을 얻었으며, 민중 봉기 동안 루이 16세를 옹호하다 부상을 입었다.[2] 이후 정규 보병 연대로 전출되었다. 그는 오랭주 루파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경 기병 연대 소속 평민 출신 군인이었다. 18세에 프랑스 근위 연대에 입대했고, 프랑스 혁명 발발 후 공화파였던 그는 귀족 장교들이 망명하면서 군대 내에서 승진을 거듭했다.

2. 1. 출생과 성장

르페브르는 1755년 5월 28일 알자스 루파흐에서 제분업자이자 퇴역 기병의 아들로 태어났다.[2]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그는 사제였던 삼촌의 손에서 자랐는데, 삼촌은 그를 교회에 들어가게 하려 했지만 실패했다.[2] 콜마르 검찰청에서 서기로 일한 후, 1773년 프랑스 근위대에 입대했다.[2] 평민 출신인 르페브르는 진급 기회가 거의 없었고, 1777년에는 병장, 1788년에는 하사관으로 진급했다.[2] 1783년 카트린 휍셔와 결혼하여 14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모두 그보다 먼저 사망했다. 루이즈 퓌질에 따르면, 그의 마지막 아들인 장군은 1812년 12월 19일 빌나에서 사망했다.[2]

2. 2. 결혼

1783년 카트린 휍셔와 결혼하여 14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모두 르페브르보다 먼저 사망했다.[2] 루이즈 퓌질에 따르면, 그의 마지막 아들인 장군은 1812년 12월 19일 빌나에서 사망했다.

3. 프랑스 혁명기 활동

프랑스 혁명 초기 군대에서 빠르게 승진한 르페브르는 프랑스 혁명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799년 1799년 프랑스 입법 선거를 통해 정치에 입문하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브뤼메르 18일 쿠데타를 지지하고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3. 1. 프랑스 혁명 초기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공화파였던 르페브르는 귀족 출신 장교들이 망명하면서 군대 내에서 승진을 거듭했다. 그는 전장에서 용감하게 활약하여 1794년에 장군으로 승진했다. 몇몇 군단에서 선봉 부대의 지휘를 맡아 활약했다.

3. 2. 프랑스 혁명 전쟁

르페브르는 1792년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이 시작될 당시 대위 계급을 가지고 있었다.[2] 1793년 12월 2일 여단장으로 진급했다.[2] 모젤군에 배속되어 1794년 6월 24일 플뢰뤼스 전투에 참가했고, 그 후 몇 년 동안 라인 강 전선에서 복무했다.[1] 1797년 9월 라자르 호슈 장군이 사망한 후, 상브르-뫼즈 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799년 3월에는 장 바티스트 조르당 휘하의 도나우 군 선봉 부대를 지휘했지만, 작전 첫 주 동안 백선에 걸려 도미니크 방담이 일시적으로 그를 대신했다. 이후 오스트라흐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는데, 이 전투에서 선봉 부대가 초반 전투의 주된 공격을 받았다.

1799년 5월, 르페브르는 사단장으로서 정치에 입문하여 1799년 프랑스 입법 선거에서 500인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장 바티스트 트레야르를 대신하여 총재정부의 의석 후보로 나서기도 했다.[2] 선출되지는 못했지만 파리 군사 지사로 임명되었다.[2] 이 역할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지지하기로 동의했고, 브뤼메르 18일 쿠데타의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 1800년, 보나파르트에 대한 그의 충성은 원로원(Sénat conservateur) 의석으로 보상받았다.[1]

3. 3. 정치 활동

르페브르는 1799년 5월, 사단장으로 잘 알려져 있었으며, 1799년 프랑스 입법 선거에서 500인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정치에 입문했다. 그는 장 바티스트 트레야르를 대신하여 총재정부 의석 후보로도 나섰다.[2] 그러나 선출되지는 못하고 파리 군사 지사로 임명되었다.[2] 이 직책을 맡으면서 르페브르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지지하기로 했고, 브뤼메르 18일 쿠데타가 성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 1800년, 보나파르트는 그의 충성에 대한 보답으로 원로원(Sénat conservateur) 의석을 주었다.[1]

4. 나폴레옹 전쟁기 활동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르페브르 동상


르페브르는 나폴레옹의 충실한 부하로서,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나폴레옹 집권에 기여했다. 나폴레옹은 르페브르의 공적을 높이 사 단치히 공략 후 그에게 단치히 공작 작위를 수여했다.[1][2] 그러나 르페브르는 베스트팔렌 왕국 왕위 제안을 신분에 맞지 않다며 거절했다.

이후 르페브르는 반도 전쟁,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러시아 원정,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등 나폴레옹의 주요 전쟁에 참전하여 활약했다. 소르노자 전투에서 승리했고,[1] 아른호펜 전투, 에크뮐 전투,[1] 바그람 전투 등에서 바이에른군을 지휘했다. 보로디노 전투에서는 구 근위대 보병대를 이끌었다.[1] 티롤 반란 진압 임무를 맡았으나 실패하여 교체되기도 했다.[4] 1814년 4월, 르페브르는 원로원에서 황제의 퇴위에 찬성했다.[2]

4. 1. 제국 원수 임명

1804년 5월 19일, 르페브르는 제국 원수 4명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3] 그는 12월 2일 황제 대관식에서 나폴레옹에게 ''조이유즈''를 바쳤다.[2]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기간 르페브르는 마인츠에서 예비 군단을 지휘했으며, 라인강 좌안에 있는 3개의 데파르트망도 지휘했다.[2] 그는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기간인 1806년 작전에 황실 근위대의 보병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2]

1807년 1월 23일, 단치히 점령 명령을 받았다.[2] 제10군단을 이끌고 르페브르는 두 달 간의 포위 끝에 5월 24일 도시를 점령했다.[2] 4일 후, 나폴레옹은 그에게 승전 칭호인 "단치히 공작"(Duc de Dantzig)을 수여했다.[1][2]

4. 2. 주요 전투

1806년, 르페브르는 황실 근위대의 보병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2] 1807년 1월 23일, 단치히 점령 명령을 받고,[2] 제10군단을 이끌며 두 달 간의 포위 끝에 5월 24일 도시를 점령했다.[2]

1808년에는 나폴레옹의 반도 전쟁 작전에 참여, 10월 31일 소르노자 전투에서 스페인군을 격파했다.[1] 1809년에는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 바이에른군을 지휘하여 아른호펜 전투, 에크뮐 전투,[1] 바그람 전투에서 싸웠다.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는 구 근위대 보병을 지휘하며 보로디노 전투에 참전했다.[1] 이후 1813년 독일 원정과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의 1814년 프랑스 원정에도 참전했다.[2]

5. 부르봉 왕정복고 이후

르페브르는 제2차 왕정복고 시기에 귀족원에서 배제되었으나,[2] 원수 계급은 유지했다. 1819년 3월 5일 루이 18세는 그의 귀족 지위를 회복시켜 주었다.

5. 1. 귀족 지위

프랑스 왕정복고 시기 루이 18세는 르페브르를 프랑스 귀족으로 임명했다.[2] 그러나 나폴레옹엘바섬에서 돌아와 백일천하를 열자, 르페브르는 다시 나폴레옹에게 충성을 바쳤다. 이 때문에 나폴레옹 패배 이후 귀족 지위를 잃었으나, 원수 계급은 그대로 유지되었다.[2] 이후 1819년 3월 5일, 루이 18세는 그의 귀족 지위를 회복시켜 주었다.

5. 2. 사망

르페브르는 1820년 9월 14일 파리에서 사망했으며,[2] 앙드레 마세나 근처의 페르 라셰즈 묘지에 묻혔다. 향년 65세였다.[2]

그는 자신의 계급과 부를 가져다준 위험을 결코 잊지 않았다. 한 친구가 그의 재산을 부러워하자 르페브르는 "마당으로 내려와, 30보 거리에서 머스킷 총으로 당신에게 10번 쏘겠습니다. 만약 내가 빗나가면, 모든 재산이 당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친구가 이 제안을 거절하자 르페브르는 "이 모든 것을 얻기 전에 훨씬 더 가까운 거리에서 나에게 천 발의 총알이 쏟아졌었다"고 덧붙였다.

6. 대중문화 속 르페브르

르페브르는 사샤 기트리의 1955년 영화 ''나폴레옹''에서 이브 몽땅이 연기했다.

필립 게달라의 대체 역사 시나리오 "만약 스페인의 무어인이 승리했다면"(1931년 선집 ''만약 그랬더라면''에 수록)에서는 나폴레옹이 보압딜 왕가를 폐위시킨 후 르페브르를 그라나다의 국왕 유세프 1세로 임명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는 이베리아 반도 전쟁을 연상시킨다.[1]

참조

[1] 서적 Magill's Guide to Military History Salem Press, Inc.
[2] 웹사이트 28 mai 1807 : Le maréchal Lefebvre devient duc de Dantzig https://www.napoleon[...] 2023-09-10
[3] 서적 Napoleon's Marshals Empiricus books
[4] 웹사이트 Andreas Hofer and the insurrection in the Tyrol, 1809 https://www.napoleon[...] 2023-09-10
[5] 서적 European Political Facts 1789–1848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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